신앙 고백

나는 사이비 아닌 이상 종교의 가르침은 뭐가 되었던 이승을 살아가는데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며, 또한 각기 다른 종교라도 결국은 서로 통하는 부분이 많다고 본다. 다만 내세관에는 차이가 있다.

불교는 사람의 수양이 극에 달하면 부처의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그러니까 불교 관점에서 모든 생물의 최종 목표는 영겁의 윤회를 거듭하며 부처의 경지에 이르는 것이다.

기독교는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말한다. 나는 이게 더 맞는 말 같다.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 잘난 놈은 교만해서 못난 놈은 미련해서 결국 관성대로 운명대로 배역대로 살다 간다. 어느 영화 대사처럼 사람은 자기 팔꿈치 조차 핥을 수가 없다.

기독교는 그러니 서로 사랑하라 말한다. 다른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나 자신 조차 변화시키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있는 그대로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이 얼마나 큰 가르침이며 위대한 역설인가?

모순 가운데 지 잘난 맛에 사는 자존심 덩어리들이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 리 없다. 온전한 사랑은 오직 예수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 교리. 이렇게 놓고 보면 참으로 타당하지 아니한가?

동정녀가 낳았다거나 물 위를 걸었다거나 오병이어로 군중을 먹였다거나 죽었다 사흘만에 부활했다는 등의 서사는 설화적이라 치더라도, 예수 또는 그 비슷한 어떤 존재가 없다면 인간은 서로를 온전히 사랑할 수 없다는 가정은 참으로 합당해 보인다.

삶은 고통. 기쁨은 짧고 고통은 길다. 물질 세계 동물에게 고통만큼 명징한 것은 없다. 나와 세상의 고통에 대한 해석이 세계관. 이해되지 않는 부분도 있지만, 나는 기독교 세계관에 동의한다.

인간 본성을 알 수록 예수의 삶과 죽음에 관한 설정에 깊이 공감한다. 저 멀리 높이서 병신들 구경하면 재미있다. 말 안통하는 답답한 인간들 속에 부대끼며 해꼬지 당하는 것이 좆같은 것이다.

예수의 실존은 역사 학계 학자 다수가 동의하지만, 이것이 그의 신성을 증명하는 근거는 아니다. 만일 예수의 신성이 허구라면, 예수 신화 작가는 인간 본성에 정통한 인류학자일 것이다.

수십년 기독교 신자로 살았지만 믿지 않을 이유도 충분히 많다. 그래도, 타인과 세상에 폐가 되지 않는다면, 신앙 놓지 못할 듯. 나약하고 생각 많은 나는 의지할 대상과 삶의 의미가 필요하다.

내가 신앙을 가지는 이유를 하나만 꼽으라면 내가 너무 약하기 때문. 이를 깨달은 이후 나는 어떠한 전도 활동도 하지 않는다. 나보다 강한 자의 신념을 바꾸려 드는 것은 어불성설 코미디니까.

지금껏 소원들을 이루길 바라며 서두르고 조바심 내며 살았다. 돌이켜보면 당연하게도 원하는 대로 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도 꼭 필요한 것은 주어졌고, 생각지도 않은 수확도 있었다.

그러고보면 믿음 안에서 조바심은 필요 없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한 것은 내가 틀린 길을 택했거나 아직 때가 아닌 증거. 내 뜻이 하나님 계획과 달랐음을 확인할 따름. 얼마든지 그럴 수 있다.

나의 성공 또는 실패 따위가 내 삶의 의미와 운명을 정하지 않는다. 고통을 면하면 당연히 좋지만, 정말 중요한 것은 고난 중에 주를 의지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약한 나는 고통 앞에 먹먹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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