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행복과 고통의 대차대조표라면, 고통이 압도적으로 큰 만성 적자 구조. 전도서 기자는 말한다. 세상에 나지 못하고 어미의 태중에 죽은 아이가 가장 행복한 자라고.
이런 말 들으면 대부분 십중팔구 우리 주변에는 좋은 사람도 즐거운 순간도 많다고 말할 것이다. 맞는 말이지만, 냉정히 말하면 어차피 살아야 하는 입장의 자위에 가깝다.
인생은 그저 유전자 작용에 의한 현상일 뿐이며 아무 의미도 없으니 매일 작은 행복을 즐기며 살라는 자도 있다. 이러한 세속적 낙관주의도 유용한 측면이 있지만 결국은 근시안에 불과하다.
보다 넓은 시야로 시간과 장소의 축을 조금만 넓혀 인류 역사와 우리 사회를 보라. 고통은 명징하고 항시적이며, 기쁨과 행복은 찰나의 바람일 뿐이다. 인간은 이러한 운명의 터널을 지나야할 가련한 존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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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후의 만찬 이후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강론하는 예수 |
인간은 자기만 잘났고 자기 밖에 모르고 당장 눈 앞의 것에만 급급한 근시안. 진정한 사랑을 할 수 없고 사랑받을 자격도 없다. 권능을 행복으로 바꿀 재능이 부족한 인류가 만든 세상은 고통으로 가득하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셨다.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가 차라리 맞을 인간에게 제시된 예수의 새 계명은 그야말로 인생의 본질을 꿰뚫는 기막힌 역설.
진리는 원칙 자체는 단순한데 현실 적용이 어렵다. 반면 사이비는 당장은 후련하지만 파고들 수록 근본이 없다. 인생을 알아갈 수록 예수의 가르침이 위대한 진리임을 새삼 느낀다.
불교 또한 훌륭하지만, 사람이 수행을 거듭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은 인간을 과대평가한 것으로 보인다. 업에 의해 윤회를 거듭한다는 설정을 감안해도. 기독교의 영생이란, 한 영혼이 스스로 돌이키길 기다리는 무한의 관용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