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랫만에 읽은 소설 엔도 슈사쿠 '침묵'은 일본 근대화 당시 핍박받던 포르투갈 선교사 세바스티앙 로드리고 이야기.
소설 제목 그대로, 선교사와 일본 신도들의 고통에 하나님은 침묵으로 일관한다. 결말부에 선교사가 들었다는 하나님 음성도 실은 배교를 합리화하려는 자기 최면일 뿐일지 모른다. 이렇듯 고통 중에 선교사가 겪은 신의 존재와 신앙에 대한 고뇌는 오늘날 우리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만사가 형통한 와중에 주님께 영광을 돌리는 행위는 비교적 쉽지만, 고통 중에 신음할 때 침묵하는 주님의 존재와 섭리를 인정하는 것은 어렵다.
때로는 고통 중에 극적 구조를 경험하기도 한다. 물론 이 또한 신의 섭리로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저 우연일 뿐일 수도 있으니. 하지만 이러한 우연이 거듭된다면, 이는 우연을 가장한 초월적 섭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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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은 이렇게 슬픈데, 바다는 푸르기만 합니다. - 엔도 슈사쿠 침묵의 비(沈默の碑) |
그런데 반대로 감당할 수 없는 후회와 고통 가운데 주님께서 침묵으로 일관한다면, 우리 나약한 인간은 어떻게 해야 할까? 소설 '침묵'의 선교사에게는 고통 중에 그래도 최소한 배교라는 선택지라도 있었지만, 우리내 인생에 찾아오는 극심한 고통은 그 어떤 선택의 여지도 남기지 않은 채 몰아치는 경우가 많다.
박완서 작가는 아들 먼저 보내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다고 한다: 그저 하나님께서 계신다는 한 말씀만 해달라고. 그렇게만 해 주시면, 아들을 데러가신 이유를 알지 못해도 그저 주님 섭리로 받아들이겠다고.
하지만 나 따위는 그저 우주의 먼지일 뿐임을 증명이라도 하듯, 내 고통 따위 아랑곳 없이 세상은 평소와 같이 아무렇지도 않고 어리석은 인간들도 그저 태연자약할 뿐이라면, 나약한 신자의 막연한 신앙의 의미는 과연 무엇인가?
과거를 돌이킬 수도 한 치 앞의 미래 조차 알 수도 없는 시간에 얽매인 삼차원 존재인 인간은, 그저 하루 하루 앞으로 나아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다. 신의 존재를 확증할 능력이 없는 미약한 나는, 내가 걷는 오욕의 세월 조차 부디 크고 오묘한 섭리의 일부이길 갈망할 따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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