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싱 초보 지도

지인들이 종종 '지금 너랑 스파링하면 졸라 맞겠지?' 말한다. 그럼 나는 맞는게 문제가 아니라 당장은 3분 1라운드 못 버티고, 체력 올라오려면 지금부터 적어도 석달은 걸린다고 말해준다.

그런데 실감을 못한다. 운동 좀 했다고 허세부리는줄 안다. 있는 그대로 말했을 뿐인데. 그나마 듣기 좋게 말한건데. 더 정확히 말하면 링에서 버티는건 고사하고 기본 자세 유지도 어렵다. 아니 줄넘기만 해도 쓰러질걸?

내 말 실감 못하는 이유는 소싯적 젊고 한 가닥 하던 자신을 떠올리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기억 가지고 어느 날 갑자기 축구나 농구 같은 운동 하면 큰 부상 당할 수 있다. 뇌가 기억하는 운동 신경을 몸이 따라주질 못하니까. 이제 더 이상 또래에게 복싱 권하지 않지만, 한 번 쯤 체육관 들러서 현재 몸 상태 인지하는 것은 좋은 경험.

어쩌다보니 복싱 만으로 곧 5년. 그러고보면 복싱은 스타트업이 갖춰야할 미덕을 갖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기술 자체는 단순하기 짝이 없는데 강하고 실용적이며 무한의 응용이 가능하다. 

그 동안 세 명의 관장님을 거쳤지만 체육관은 한 군데만 다녔는데, 오늘 처음으로 다른 체육관 놀러가서 이제 막 시작한 친구를 좀 봐줬다. 물론 체육관에 사전 양해 구하고. 친구 자세는 예상보다 나쁘지 않았다. 어깨 힘 빼고 허리 펴고 골반 돌리며 팔을 쭉 뻗는 자세 보고 굳이 손볼게 없다고 느꼈다. 중심이 앞으로 쏠리지도 않았다. 초보 치고 이만하면 훌륭하다.

굳이 지적을 하자면 잽 칠 때 스텝 조금 많이 나가는 것과, 습관적으로 앞 손 모으는 정도. 앞 손은 계속 교정해도 못 고치길래 여느 초보자가 그렇듯 아직 손을 계속 들고 있기 힘든갑다 했는데 알고보니 자기 나름대로는 방어 상황 가정하여 그런거더군. 가드는 거리 없이 몰렸을 때만 올리면 된다 알려주고 앞 손 싸움 상황 예를 들어 보여주니 금방 알아들었다.

아무튼 이제 한 달도 안되서 아직 체력도 올라오지 않은 쌩초보가 이 정도 자세가 나올 정도면 결코 허술한 체육관은 아니다. 그런데 친구는 나름대로 불만이 있었다. 자세는 잘 가르쳐주는 것 같고, 오늘 내 말 들으니 더욱 실감이 되는데, 그래서 앞으로 언제 어떤걸 배우고 어떻게 성장할 수 있는지 감이 오지 않으며, 물어봐도 명확한 답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여기는 철저한 기본기와 원포인트 레슨 중심으로 가르치는 듯 한데, 이런 곳이 구력있는 경험자에게는 좋을 수 있는데 초보자에게는 답답할 수 있다. 어느 교육 시장이나 초짜 비율이 가장 높은데, 복싱 초짜에게는 다닌지 얼마 지나면 뭘 배우고 또 얼마 지나면 뭘 하고 이런 시스템을 가진 체육관이 아무래도 더 재미있다. 옆을 보면 내가 조금 있으면 저런걸 하겠구나 알 수 있다.

그런데 시기별로 진도는 잘 뽑는데 기본기는 엉성한 채로 그냥 두는 경우도 있다. 지도를 대충하는게 아니라 나름 열심히 하는데도 이럴 수가 있다. 정말 말도 안되는데 잘한다 잘한다 진도만 뽑으면 결국 늘지를 않는다. 처음에 엉성한 자세가 굳어지면 나중에 고치기도 어렵다. 모든 운동이 그렇듯 힘을 빼고 기본에 충실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늘지를 않는다.

복싱 하면 가장 많이 듣는 말은 바로 힘 빼라는 말이고, 그 다음 많이 듣는 말은 자세 바로 하라는 말. 모든 운동이 마찬가지지만 복싱은 특히 그렇다. 왜냐면 복싱 펀치 원동력은 바로 스피드이기 때문.

힘을 내려면 힘을 빼야 한다. 힘을 주면 스피드가 죽는다. 자세가 중요한 이유도 같다. 허리 펴고 골반 돌려 팔을 쭉 뻗는 복싱 기본 자세는 펀치 스피드 극대화에 최적화된 동작.

그러면 정말 힘을 아예 안주냐? 기본 자세 익히면 힘을 주기는 한다. 단, 이 힘도 펀치 스피드 극대화를 위한 것. 그러면 언제 힘을 줄까? 팔 다 뻗는 순간만 끊어 치듯 잠깐 준다. 숙달되면 펀치가 마치 펜싱 사브르 찌르듯 빠르게 나간다. 이러한 스피드 때문에 힘빼고 툭 던져도 강하게 꽂히는 것이다.

야구 축구 만큼은 아니지만 복싱도 나름 자리 잡은 사회 체육 종목이지만 명확한 커리큘럼은 없다. 물론 큰 줄기는 있지만 복싱 기술이 단순해서 그런지 디테일은 결국 관장님 재량. 그런데 관장님들은 일반인 초짜의 애로 사항을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복싱 선수 입장에서 초보 때 기억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

그러니까 복싱 선수 시절 기량과 사회 체육 교사로서 지도력은 비례하지 않을 수 있다. 특히 초보자 다루는데 있어서는 엄청난 경력을 가진 선수 출신보다 차라리 최근에 몇 년 배운 일반인이 나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나는 당연히 마이클 조던보다 농구를 못하지만, 마이클 조던보다 농구 초심자에게 레이업슛을 더 잘 가르칠 수는 있다.

그런데 고수는 무료로 지도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진짜 잘 하는 사람은 괜히 남들 가르친답시고 주접떨지 않는다는 뜻이다. 있거니와, 다만 다른 회원이 직접 요청하거나 관장님이 나에게 직접 지도를 부탁하는 경우는 문제될 것이 없다. 실제로 이렇게 했던 관장님이 있었고 이 분은 내가 겪은 관장님 중 가장 뛰어난 분이었다. 선수 커리어와 사회 체육 지도 능력 모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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