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신앙의 본질과 한국 개신교 교회의 문제점

신학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지식이고, 신앙은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는 방식. 지식 없는 실천은 방향을 잃고, 실천 없는 지식은 힘을 잃는다. 지금 한국 교회는 방향 없이 열심만 내고 있다. 설상가상 그 열심이 예수의 가르침과 반하는 경우도 많다.

다시 말해 한국 교회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첫째, 교회 안에 신학이 없다. 신학 전공한 목회자는 설교에 성경 구절을 인용하지만 정작 신학은 없다. 냉정히 말하면 백화점 문화 센터 교양 강좌 수준.

둘째, 개인별 도전 과제가 없다. 교회가 완전한 사람만 모이는 곳은 아니지만, 매일 조금씩이라도 나아질 필요는 있다. 사람이 하루 아침에 바뀌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라 예수 닮기 위한 작은 과제들이 계속 주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신학이 없으니 실천 과제도 없다. 신학이 있다 한들 분쟁이 두려워 안주한다.

말하자면 이상적인 교회는 영적 체육관인데, 지금 한국 교회는 노인정 같다. 모이기 힘쓰는 신자들은 여러 활동으로 바쁘지만, 정작 신앙 성장과 삶의 변화는 없다. 결국 의미 없이 모여서 시간이나 죽이는 샘.

독일 철학자 리하르트 다비트 프레히트는 기독교는 영아 사망률 높고 평균 수명 40세 미만이던 고통으로 가득한 중세 시대 현실을 위로하는 내세관을 제공하기 위해 만들어진 종교이며, 현대 사회는 이보다 훨씬 풍요로워 기독교 권위가 예전 같지 않다고 진단했다. 맞는 말이다. 그럼에도 기독교가 지금도 유효한 이유는 세상은 여전히 고통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기독교는 정신 승리의 종교다. 그런데 승리 방식이 독특하다. 내가 아니라 신이 승리하는 것이다. 나의 승리로 인해 신이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은 하잘 것 없는 내 삶을 통해서도 승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할 일은 그저 하찮은 인생을 묵묵히 살아내는 것이고, 매일 조금씩 예수 사랑에 감동하고 감사하며 실천하는 것이다.

또한 기독교는 사람의 노력으로 진정한 승리를 이룰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노력의 의미는 도대체 무었인가? 노력의 의미는 그로 인한 성취가 아니라, 신이 나와 함께 하시는 과정이자 증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바꿔 말하면 사실 나는 올바른 노력 조차 할 수 없는 지극히 불쌍하고 대책 없는 죄인이며, 나는 그저 신의 은총을 담을 그릇일 뿐이다.

결국 기독교 신앙의 핵심은 다름아닌 철저한 자기 부인. 나 자신을 끊임없이 부인하고 부정하여 스스로 패배자의 자리에 서고,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신에 대한 믿음 덕분에 패배와 자기 부인이 값 없이 받은 은혜가 되는 역설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 여기서 신에 대한 믿음을 빼고 나면 더 이상 비참할 수 없는 실패자의 한심한 자기 위안.

그런데 오늘날 한국 교회는 구하는 대로 복을 받아 내가 잘되고 나를 지키는, 내가 주체적으로 예수 믿어 쟁취한 구원을 스스로 확신하는, 시작만 있고 성장은 없는 구원파와 다름 없는 신앙을 전한다. 이것이 경제 부흥기에 사람들을 교회로 모으고, 모인 사람을 그럭저럭 묶어두는데 최적화된 방식이기 때문인데, 이제는 약발이 다해 한국 교회 교세는 급격히 줄고 있다.

한국 교회가 급속히 부흥한 이유는 성령 열매 따위 관심 두지 않는 자기 중심적 기복 신앙 덕분이고, 최근 한국 교회가 급격히 몰락하는 이유는 성령의 열매에 여전히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고보면 마키아벨리 말이 참 맞다. 사람도 조직도 여간해서 바뀌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 그 성질이 운 좋게 시류에 부합하면 흥하고 그렇지 않으면 망한다.

주술적 기복 신앙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이유는 상승장에는 누구나 돈을 따지만 하락장에는 그렇지 않은 것과 같다. 세벽 기도 십일조 열심히 했더니 결혼하고 집값 오르더라는 오비이락 축복은 더 이상 흔한 일이 아니다. 그 보다 풍요 속의 빈곤으로 인한 상대적 박탈감과 군중 속의 단절과 외로움이 현재 우리 사회를 관통하는 공통된 정서이자 아픔이다.

나는 정말 잘 살았는데 결과가 이 모양 이 꼴이라 여기면 남는 것은 원망과 불안 뿐이다. 반대로 나름 한다고 했지만 돌아보니 실수 투성인데, 그래도 삶이 어찌 어찌 유지가 되었다면 감사 밖에 할 것이 없다. 지금껏 교회는 감사와 평안의 복음을 전하지 않고 오히려 속물 근성을 자극했다. 교회 규모 유지와 확장을 위한 출석 유도와 헌금 모금에 유용하기 때문.

한국 교회 근본 문제는 개신교 신앙의 참 뜻을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것이다. 잠시 부흥을 이뤘지만 결국 고사할 위기에 처했다. 인류는 강력한 힘을 개발하는 일에는 능숙하지만 그 힘으로 행복을 만드는 데는 미숙하다. 석기 시대보다 수 천 배 강해졌지만 그 만큼 행복하지는 않다. 불행한 현대 인류는 마음 속 깊이 기독교 신앙의 본질적 가르침을 갈구하는지도 모른다.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거할 때, 내 말이 너희 안에 존재론적 일치를 이룰 때, 고난 중에 주의 지혜를 구하고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말라. 은혜를 이미 받은 줄로 알라. 내가 당하는 고난의 참 의미를 깨달으면 그것은 더 이상 고난이 아니다.

현재 한국 교회는 규모 유지에만 골몰할 뿐 신자 개인의 신앙 성장에 관심이 없다. 모이기에 힘쓰지만 모이는 이유는 고민하지 않는다. 학교 공교육 제도가 학생 개인의 성장에 관심이 없는 것과 비슷하다. 학생의 실질적 성장에 관계 없이 시간만 때우면 주는 초중고 졸업장은 더 이상 가치가 없다. 이렇게 보낸 시간은 교도소 징역 살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학생 대부분이 준비되지 않은 채로 다음 학년 올라가니 수업을 이해할 수 없다. 이해 못할 수업은 학생이 아닌 교사 일자리를 위한 것이다. 학교는 졸업이라도 하는데, 교회 평생 다녀도 참 신앙은 싹도 틔우지 못하는 경우가 태반. 성경 의미 왜곡하거나 심지어 다루지도 않는 이해할 가치도 없는 설교의 반복은 성도가 아닌 목회자 일자리를 위한 것이다.

학교 공교육 제도를 비판하는 사상가는 학교의 형태가 기본적으로 교도소와 비슷하다 말한다. 교도관의 지상 과제는 수감자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도록 통제하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 모습도 별반 다르지 않다. 유입된 성도를 어떻게든 묶어두는 데만 급급하며 비상식적인 수준의 믿음에 머무른다. 유사 기독교 사이비 종교들은 바로 이러한 허점을 파고 든다.

한국 교회는 구별된 삶과 믿음 성장 경험을 주지 못하고 있다. 세상에 문제 없는 교회는 없다 변명하며 헌신 의무만 강조한다. 내적 성장을 바라는 신자는 스스로 성장 욕구를 누르거나 교회를 떠난다. 질문이 사라져 통제하기 쉬운 교회는 맛을 잃은 소금 같이 썩은 목사 숭배의 장이 되곤 한다. 목사 추종에 결부된 자존심과 자기 연민을 극복하지 못하는 것이다.

요즘 뜨는 대안인 일하는 목회자 모델은, 대안이기 이전에 탈종교 시대를 맞는 한국 교회 현실 자체 아닐런지. 쉽게 말해 다른 일과 병행하지 않으면 생계 유지가 곤란할 만큼 교회 서비스 시장이 쪼그라든 것이다. 그럼에도 일하는 목회자 모델은 나쁘지 않은 대안이라고 보지만, 목회자 개인이 너무 큰 부담 감당하는 모양새라 근본적인 해결책인지는 모르겠다.

몇 년 전에 건물 없는 교회가 대안으로 각광받았다. 그런데 정작 운영해보니 건물 짓는 것이 임대료 내는 것 보다 차라리 싸게 먹히더란다. 그럼에도 공간 문제는 한국 교회의 고질적인 팽창 주의를 관통하는 주요 원인이라고 본다. 단지 건물을 소유하지 않는 것이 아닌, 공간 사용과 유지에 소요되는 비용을 최소화 제로화하는 시도는 앞으로도 계속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설교 중심의 예배 형태도 바꿔볼 필요가 있어 보인다. 굳이 모든 목회자가 설교를 할 필요도 없다고 본다. 인강 시장과 마찬가지로 성경 강해 설교는 일타 강사만으로 충분하지 싶다. 설교 부담 벗으면 목회자는 유기적인 커뮤니티 관리에 집중할 수 있지 않을까? 음성 설교와 차별화되는 강해 텍스트나 예술 작품을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지금의 한국 교회가 자정 능력 상실한 레거시 시스템. 변화는 기성 교회 내부가 아닌 교회 밖의 교회에서 움틀 가능성이 크다. 막연하나마 내가 생각하는 대안을 정리하자면, 경건을 위한 최소 자원과 형식만 사용하는 온오프 믹스 공동체, 이를 주도하는 목회자 최소 생계 유지 돕는 후원 시스템 구축, 그리고 다양한 교회 형태를 아우르고 분별하는 핵심 원칙.

사람마다 고유한 텔런트가 있다면, 이상적인 교회 모습은 각자의 은사가 예수를 바라보며 상호 보완적으로 정렬되는 것이다. 말처럼 쉽지는 않다. 사람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기 쉽고, 본능적으로 다른 존재를 배척한다.

감정 뜨거운 사람은 산통 깨는 비판이 거슬리고, 이성이 냉철한 사람은 섣부른 맹신이 우습다. 현실적인 사람은 이상이 같잖고, 이상적인 사람은 현실이 천박하다. 결국 끼리끼리 모여 더욱 자기 중심적이 되어 서로 헐뜯기 바쁘다.

그렇다면 교회에서도 리더십이 중요할텐데, 교회에도 좋은 리더는 드물다. 요즘 교회의 리더격인 목회자들 리더십은 두 종류. 군림하거나 방관하거나. 역량을 설교에 몰빵하여 리더십이 실종되었다. 설교라도 잘 하면 그나마 다행.

그러고보면 교회의 리더가 반드시 신학자 출신일 필요는 없는지도 모르겠다. 교회 리더로서 신학자가 압도적으로 유리한 조건 갖춘 것은 맞지만, 신학 대학 졸업장과 건강한 교회를 만드는 리더십의 상관 관계는 크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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