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로 주께서 이 백성을 완전히 속이셨습니다. 예루살렘은 안전하다 하셨으나, 이제는 칼이 목에 닿았습니다. - 예레미야 4:10
목사님들 설교 들으면 우리는 흔히들 잘되면 내 탓 안되면 하나님 탓 한다는데 정말 그런가? 내 생각엔 교회 좀 다닌 사람들은 오히려 잘되면 하나님 탓 안되면 내 탓하는 경우도 많지 싶다. 진심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성공하고 잘되면 하나님이 도우셔서. 실패하고 안되면 내가 부족해서. 잘되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탓 안되면 어리석고 죄 많은 내 탓.
신은 전지전능하고 우리 인간은 물가에 내 놓은 아이처럼 어리석고 나약하다. 근데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셔서 자유의지를 주셨다. 전지전능한 그 분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인격체로 존중한다는 것. 우리의 어리석음을 그분의 절대 지혜로 지배하지 않고 우리의 자유의지가 그 분의 지혜와 닮을 때 까지 기다리신다. 우리의 계획이 신의 계획과 일치할 때 까지 기다리신다. 공자의 지천명(知天命)은 사람이 신의 지혜를 닮아서 신이 주신 사명을 아는 경지를 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우리 의지에 따라 선택할 수 있고 그 선택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갈린다. 근데 잘되면 신의 뜻 안되면 자유의지 이건 좀 아니잖아. 물가에서 놀던 아이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자유의지로 죽었다고는 안하잖아. 부모가 제대로 안 보살핀거지. 근데 또 성경은 우리의 모든 일을 여호와께 맡기라고 말씀하신다. 진짜 싹 다 맡기고 싶다. 한치 앞도 모르고 하루하루 선택을 해야 하는 어리석은 인간의 입장에서 자유의지는 그저 버겁기만 하다. 그렇다고 주님의 말씀이 라이브로 들리는 것도 아니고. 거추장스러운 자유의지 따위 다 반납하고 싶다.

그럼 도대체 어디까지가 전지전능하신 절대자의 계획이고 어디까지가 우리의 자유의지일까? 딱 잘라 말하기 참 어렵지만 그래도 한번쯤 고민해 봐야 할 문제. 사람은 환경에 아주 많은 영향을 받는 존재다. 사회적 문화적 환경은 사람의 가치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다. 우리는 뻑하면 소주에 삼겹살이자만 이슬람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사람이 굉장히 지혜롭고 독립적인 존재 같지만 실은 어리석고 나약한 존재라서 다른 사람의 생각과 사회의 관점에 언제나 귀 기울인다. 그래서 사람들은 대부분 사회의 가치관에 갇혀 산다.
우리는 어두운 동굴 속에 산다. 동굴 밖에는 햇살이 비추는 푸른 세상이 펼쳐있다. 하지만 동굴 속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온 세상은 어둡고 습하고 딱딱하다고 생각할 수 밖에 없다. 그럼 혹시나 우연히 햇볕을 보더라도 햇볕을 따라가기 보다는 무서워서 얼른 도망가는 것이 평범한 사람 심리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변화를 두려워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동굴 밖에서 나고 자란 사람은 햇살과 시냇물 소리가 당연한 일상이다. 그러니까 어떤 환경에서 나고 자랐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 결정된다. 따라서 그 사람의 사회적 문화적 환경은 평범한 사람의 의지만으로는 쉽게 극복하거나 초월할 수 없다. 따라서 이러한 환경적 요건은 신의 계획과 뜻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똑 같은 환경 속에서도 어떻게 살아가느냐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어두운 동굴 속에 태어났더라고 동굴에 벽화를 그릴 수도 있고, 매일 푸쉬업 하며 몸을 만들 수도 있고, 노래를 할 수도 있고 아님 그냥 어두우니까 잠만 처 잘 수도 있다. 이렇듯 처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사느냐는 한 사람의 의지로 충분히 결정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자유의지 영역이라 하겠다.
처음부터 초 천재로 태어나서 주어진 환경의 맹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새로운 세상이 있음을 느끼거나, 아님 어떤 계기로 갑작스런 깨달음을 얻거나, 아님 깨달은 자가 새로운 세상을 말해 줄 때 적어도 경청하는 지혜를 갖추고 그 깨달음을 배우는 경우 주어진 환경을 극복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평범한 인간이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이 또한 신의 영역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렇게 깨달음을 얻고나서 혁명가가 되느냐 아님 그냥 주어진 현실에 안주하느냐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일 것이다.
요약하면 내가 선택할 수 없이 타고난 환경과 가치관이 신의 계획이고, 그 속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가 인간의 자유의지라고 하겠다. (물론 더 크게 보면 인간의 자유의지마저 다 신이 계획이라고 할 수도 있다는데 이런 관점은 여기서는 논외로 하자.) 타고난 환경은 각 사람의 가치관에 영향을 준다. 그 환경 속에서 선택과 노력, 지혜와 어리석음이 쌓이고 쌓이면 각 사람의 그릇이 된다. 그리고 어떤 사람들은 그릇이 남들보다 커져서 주어진 환경에서 남다른 능력을 발휘한다. 때로는 몇몇 사람들이 신의 특별한 은총을 받아 주어진 환경이나 가치관마저 초월하기도 한다.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이 아니다. 평등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릇의 크기가 다르다는 것이다. 주어진 환경과 본인의 노력에 의해 각 사람의 그릇의 크기는 천차만별로 달라진다.
따라서 아담과 이브의 선악과 사건은 분명 인간이 자유의지로 지은 죄다. 어느 날 에덴동산에 태어나서 선악과가 뭔지도 모른 채 그냥 있길래 배고파서 따 먹었다면 선악과는 인간으로서 어찌 해 볼 도리가 없는 신이 내린 환경이다. 하지만 신은 인간에게 선악과에 대해서 충분히 알아듣게 설명해줬다. 선악과가 무엇이며 이것을 먹으면 쫒겨날 것이라고. 누군가 어린 나를 붙들고 대학은 결국 노동자 양성소일 뿐이라고 내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줬다면 난 절대 입시 따위에 매달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계획과 인간의 자유의지 사이에서 한 인간의 행복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아마도 그 사람의 그릇과 주어진 환경의 궁합이 행복을 결정하는 것이 아닐는지. 왕의 그릇을 타고난 사람은 황실에서 태어나야 한다. 그래야 본인도 행복하고 제대로 된 왕을 만난 국민들도 행복하다. 근데 만일 이 왕자가 거지 굴에서 태어났다면 제대로 살아갈 수 조차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거지의 그릇을 타고났다면 다리 밑에서 태어나야 한다. 이건 거지를 무시하는 게 아니다. 세상엔 다양한 사람이 살고 이 사람은 그저 거지의 성품과 그릇을 타고났을 뿐이다. 내가 어렸을 적에 충무로에 살았는데 거지가 많았다. 거지한테 뭐가 제일 무섭냐고 물어봤더니 누가 또 거지가 될까 그게 걱정된단다. 거지처럼 편한 게 없단다. 겉으론 더럽고 추할지 모르지만 실은 그 사람보다 행복한 사람도 드문 것이다. 만일 이 거지가 황실에서 태어났다면 그 사람도 불행하고 결국엔 모든 국민들도 불행했을 것이다. 바로 이런 환경과 그릇과의 괴리가 불행의 씨앗이 아닐는지. 현실과 이상의 괴리가 바로 불행이 아닐는지.
물론 이런 반론을 제기할 수도 있다. 거지가 황실에서 태어났더라면 왕의 그릇을 갖출 수도 있고, 반대로 왕자가 거지 굴에서 태어났다면 거지의 성품을 갖출 수도 있다고. 맞는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 환경은 그 사람의 가치관과 그릇에 영향을 준다. 특히 어린 시절의 영향은 아주 크고 그래서 교육이 중요하다. 하지만 나는 사람의 그릇은 자라면서 환경의 영향을 받는 부분 못지않게 처음부터 타고나는 부분이 크다고 본다. 주변을 조금만 둘러보라. 세상엔 거지 발싸개 같은 왕자들과 왕자의 그릇을 타고난 비운의 거지들이 너무도 많다.
행복과 불행을 말하다 보면 사람들은 종종 이런 말을 한다. ‘나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다. 그러니까 난 행복하고 또 감사해야 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내가 싫어하는 말이기도 하다. 우선 이런 말은 진짜 고통 당하는 사람에게는 별 위로가 되지 않는다. 또한 언뜻 보면 긍정적인 것 같지만 조금만 곱씹어보면 이성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심지어 이기적이기까지 하다. 쟤는 나보다 못하니까 난 행복하다고? 이 얼마나 이기적인 비교인가. 그럼 쟤가 나이지면 난 불행해지나?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픈 속 좁은 심보? 우리는 고통스러워 하는 사람을 보면 자꾸 무슨 말이라도 해 주려고 한다. 근데 이게 듣는 이에겐 오히려 독이 된다. 그저 이런 사람 앞에선 그 사람이 먼저 물어오지 않는 한 닥치고 들어주는게 최고다. 내가 확실하게 도와줘서 그 사람의 고통을 아예 없에 줄 수 있지 않다면.
사실 다른 사람과 내 삶을 비교한다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다. 누구와 비교하기 이전에 나의 나 됨이 있다. 그에 따라 내가 추구해야 할 바가 있다. 그리고 나를 둘러싼 환경이 있다. 나의 나 됨과 환경이 얼마나 조화를 이루고 내가 추구할 바를 얼마나 이룰 수 있는지가 행복의 척도가 될 것이다. 처음부터 각자 주어진 조건과 그릇과 성격이 다르고 따라서 행복과 불행의 척도 또한 모두 다르다. 처음부터 식물인간이었다면 손가락 하나만 까닥 할 수 있어도 엄청난 진전이며 행복이다. 이 사람에게 걷고 뛰지 못한다고 불행하다고 말하는 건 어쩌면 이 사람과 함께 하는 신에 대한 모독이다. 반면 정상의 몸을 타고난 성인 남자라면 100 미터를 적어도 15초엔 주파해야 할 것이다. 20초에 뛴다면 그건 분명 뭔가 부족한 거다. 하루 종일 누워만 있는 식물인간도 있는데 이런 말이 도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난 이런 면에서 가수 강원래씨의 교통사고를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 강원래는 학교 공부 말고 다른 거 하면 무조건 욕먹는 한국의 현실에서 청소년기부터 과감히 춤을 췄다. 이것 만으로도 엄청난 신의 축복이다. 앞에서 말했지만 사회의 일반적인 가치관을 초월하는 건 신의 은총이다. 댄서와 무술인은 일반인과는 차원이 다른 신체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일반인들은 몸을 걷고 뛰는 데에나 쓰지만 (사실 잘 뛰지도 않지만) 댄서와 무술인들은 일반인의 굴레를 넘어 몸으로 예술을 하고 도를 닦는다. 한마디로 눈에 보이지 않는 날개를 달고 있는 샘이다. 그런데 이렇게 하늘을 날던 강원래가 하루 아침에 일반인보다도 못한 장애인이 되어버렸다. 평생을 걸쳐 댄서의 그릇을 갖춘 자가 하루아침에 장애인이 된거다. 생각만해도 아찔하다.
강원래에게 내가 싫어하는 ‘나보다 더 못한 사람도 있으니 난 행복해’ 논리를 한 번 적용해보자. 장애인 강원래보다 더 아픈 사람도 있다. 아예 처음부터 걷지 못하는 식물인간도 있다. 그런데 과연 처음부터 춤추는 건 물론 걷는 것 마저 꿈꿀 수 없는 운명의 식물인간과 댄서에서 하루아침에 장애인으로 전락한 강원래 중에 누가 더 불행할까? 앞에서 말했듯 이런 비교 자체가 어리석은 짓이고 또 남의 불행을 놓고 이렇게 왈가왈부 하는 것 자체가 그들에 대한 크나큰 결례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자 굳이 비교하자면 난 강원래 쪽이 훨씬 더 불행하다고 본다. 댄서라는 그릇과 장애인이라는 환경의 괴리는 너무나도 크다. 이런 고통을 그 누가 상상이나 하랴.
그럼 이런 글을 쓰는 나는 행복한가? 솔직히 그렇지 못하다. 혁명가의 그릇을 타고났지만 혁명을 이룰 기술을 갖추지 못했다. 난 불행하게도 한국에 태어나 대학 갈 준비만 했으니까. 대학만 가면 모든 게 다 이루어진다는 거짓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혁명가의 지혜를 타고난 반면 한 번 길을 잡으면 그것만 파는 외골수 성품도 타고나서 입시 말고 다른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하지만 수능 갓 끝내고 아무것도 모르는 열아홉 어린애에게 대학은 노동자 양성소일 뿐이었다. 그러다 어느덧 불현듯 깨달음이 찾아와 결국 억눌러왔던 혁명가의 길을 갈 수 밖에 없게 되었다. 혁명의 뜻은 있으되 기술은 없고, 소비자의 길을 걸어왔으되 더 이상 어리석은 소비자로 살아갈 수 없는. 호랑이로 태어났으되 개밥을 먹고 자라 발톱에 날은 서지 않았는데, 그렇다고 언제까지나 개밥을 먹고 살 수는 없는, 결국 현실과 환경과 이상의 괴리에 고민하는 불쌍한 청년이다. 물론 이런 고민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도 주변에 거의 없다.
따라서 내 불행은 신 탓이라고 본다. 솔직히 신은 날 좀 심하게 괴롭히셨다. 정말 딱 죽지 않을 만큼까지. 내 탓이 아주 없다는건 아니지만 신의 탓이 훨씬 더 크다고 본다. 그저 무책임하게 내 불행을 신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 아니다. 난 분명 내 그릇과 처한 환경 안에서 매우 성실한 방향으로 자유의지를 발휘해왔으니까. 하지만 신이 나를 버렸을 지라도 나는 신을 끝까지 믿고 의지할 것이다. 왜냐면 이렇게 망가져버린 나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존재는 나를 망가뜨린 신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실패는 국지적인 실패다.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는 그 실패가 아무리 처참하더라도 전체적으로 그 사람은 계속 성공의 길을 걸어온 경우다. 돈이 돈을 벌듯 일반적으로 성공은 성공을 벌고 실패는 실패를 번다. 그리고 성공보다는 실패가 훨씬 더 처참해서 한 번 실패하면 최소 몇년간은 그 여파가 지속된다. 이것이 바로 인간 세상의 엄연한 인과응보의 현실이다.
따라서 지금껏 잘못된 길을 걸어온 내게 남은 유일한 희망은 신의 축복 뿐. 신이 나를 아무리 망가뜨린다 한들 예수께서 절대 진리이며 사랑이라는 믿음은 버릴 수 없다. 설사 신이 나를 버린다 한들 나는 신을 버릴 수 없다. 이것이 내 어리석고가련한 믿음의 마지노 선. 앞을 보자. 어느 길로 가야 할 지 알았고 산의 높이를 알았다. 내가 지금 있는 곳도. 이걸 첫 번째 첫 걸음으로 하자! 내 길에서 앞으로 나아갈 일만 생각하자. 스무살이고 서른살이고 그런건 생각하지 말자. 이런 날 비웃고 싶은 놈들은 비웃으라 그래. 어제도 오늘도 넘어지고 졌지만 그래도 길은 계속되고 있어. 분명 어디론가 이어지고 있어. 비록 신이 내린 가혹한 운명으로 망가져서 쓸데없이 거추장스럽기만 한 내 인생이지만 그렇다고 버릴 수도 없으니까.
외롭다 아니 지친다 아니 질린다. 눈물 마저 말라버렸다. 하루 종일 신음해도 달라지는 건 없다. 차라리 바보처럼 웃자. 걱정하지마 행복하자고 걱정하지마 행복하자고. 오가는 전철간과 자기 전에만 애통하자. 나를 닮은 노랗고 어둡고 외로운 농구장을 만났다. 방치되어 미끄러운 우레탄 올코트. 비록 내 길의 끝이 결국 절망일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은 고즈넉하고 싶다. 안달한다고 나아질 것도 없고. 이제 나를 구할 수 있는 존재는 나를 망가뜨린 당신 뿐. 근데 솔직히 억지 웃음도 안나올 만큼 괴롭다. 그 누구도 날 도와주지 않는다는걸 알기에 철저하게 외롭다. 이게 내 운명이라고? 이럴꺼면 이런 나를 도대체 왜 낳으셨나요.. 정말 무슨 일이 있어도 교육과 세상을 바꾸고 싶다. 내가 겪는 이 고통은 내 선에서 끊을 수만 있다면 고통뿐인 수라(修羅)의 길이라도 마다하진 않겠다.

다윗은 평생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경험했기에 고통 중에도 오직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다. 평신도에게 다윗의 믿음을 강요하는 목사의 설교에는 중생들의 고통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에 대한 일말의 고찰 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 shyjune
주님은 저를 완전히 내버리셨습니까? 아니면 진정으로 저를 미워하십니까? 어찌하여 주께서는 제가 낫지도 못하게 이렇게 심하게 치셨습니까? 제가 기다린 것은 평화였습니다. 그런데 좋은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습니다. 저는 이 상처가 낫기만을 기다렸는데, 오히려 무서운 일만 당하고 있습니다. 주님, 저는 저의 사악함과 제 조상의 죄악을 인정합니다. 저는 주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주의 이름을 생각하셔서라도, 저를 박대하지 마시고, 주의 영광스러운 보좌가 욕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께서 저와 맺은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을 깨뜨리지 말아 주시옵소서. 이방 사람이 섬기는 허황된 우상들 가운데 비를 내리는 신들이 있습니까? 하늘인들 스스로 소나기를 내려 줄 수가 있습니까? 주 나의 하나님, 그런 분은 바로 주님이 아니십니까? 그러므로 저는 오직 주님께만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주께서 이 모든 것을 지으셨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아 14:19~22)
무사시. 나 최근 하늘의 목소리를 들었어. 그 목소리에 의하면, 내가 네가 이제까지도 그리고 앞으로도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결정되어 있고, 그렇기에 우리는 완전히 자유롭다. 하늘과 이어지지 않고 산다는 것은 오직 고행일 뿐. 만약 내가 태어난 이유가 있다면 하늘의 뜻대로 되라지 하고 단지 그것을 받아들이는 거다. 문이 열렸다. 오랫동안 닫혀있던 수많은 문이 한꺼번에. 자유란 이런 것이다. 지금까지 알던 자유와는 전혀 달랐다. 사람은 무한하다. 사람이 저마다 살아가는 길은 하늘에 의해 완벽하게 정해져 있고 그렇기에 완전히 자유롭다. 자신의 뿌리를 하늘에 맡겨놓은 한은. 지금 너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끌어안게 되었지. 이 세상 단 한 사람도 너의 고통을 이해할 수는 없다. 다만 무사시. 그래도 하늘은 너와 이어져 있단다. 네가 원한다면 말이지. - 베가본드 29권 #255 질문 中
비밀 댓글 입니다.
답글삭제